태평양을 건넌 식물도감

 

 

 

태평양을 건너 LA에서 이주해온 식물도감 12페이지에서 엘레지를 본다

<자주색으로 6개의 꽃잎과 산지의 비옥한 나무 그늘에서 자라는 백합과의 다년초이다>

를 읽고 나도 모르게 누나하고 불렀다

나는 식물도감에서 패랭이꽃, 달맞이꽃, 엘레지라는 이름을

숙자, 영숙, 명자 누나라

개명한다

 

태평양 건너 어딘가에 피어 있을 수많은 그녀들이 나는 그립다

해질 무렵 집집의 담장이 지친 해바라기들을 동생처럼 업고 있을 때,

누군가 찾아온 것 같아 창 밖 내다본다

이제 갓 입학하는 어린아이들이 꽃잎을 가슴에 달고 꽃밭으로 등교 중이다

 

그녀들은 나를 찾지 못하는 술래들이다

나는 날마다 꽃잎 글썽이며 식물도감을 펼쳐들고 그녀들을 찾는다

조금 더디게 피어도 한 계절 화사한 꽃들의 일기를

지나가는 소슬바람이 내 창에 매일 찾아와 옮겨 적는다

 

쪽진 반닫이 창문을 펼치면,

이 세상의 페이지마다 꽃잎들의 사연이 적혀있다

꽃잎 뚝뚝 떨어뜨리는 꽃들을 바라보면, 이제 곧 헤어져야 하는 꽃들처럼 슬프다

서울시 식물도감 구 엘레지 동 12페이지에서 나는 그녀들과 상봉한다

 

봄 한철 지나가는 아픔들이 그녀들을

활짝 꽃 피웠던 것이다

 

 

 

 

보르헤스의 숲에는 푸른 숲이 있을까?

 

 

 

  창밖의 간판들 내 눈을 유혹하고 있네요 저 오래된 거리의 풍경이 보르헤스의 숲 아닐까요? 마침 푸른빛 전화기가 울리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나는 빨간 입술 수화기에 대고 목소리를 지평선 너머까지 힘껏 던졌죠 몇 시 몇 분에 만날까요? 라끄베르 대형포스트 위의 비둘기집이나 해 한 마리 쪼르르 배달되는 맥도널드 간판 속도 나쁘진 않겠죠? 그럼 어떤 간판을 설명해야 되죠? 지금 입술과 혀 사이에 독설이 설탕처럼 녹고 있어요 보르헤스 숲속 전화기가 뚝, 끊어져버렸네요 여러 겹으로 쌓인 고물들이 전봇대 아래, 입을 벌려 시간들을 토해내고 낡은 TV는 리어카에서 떨어질 것만 같아요 한 노인이 헤진 소매를 걷어 올리는 동안 대형포스트 속의 여자가 측은한 눈빛으로 웃고 있어요 보르헤스의 숲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거든요

 

  보이지 않는 고물들의 영혼을 흩뿌리며 달리고 있는 리어카, 세월이 맞물려 팽팽하게 돌아가는 바퀴가 보여요? 노인은 저 숲의 풍경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가고 있네요 내 빨간 입술의 힘은 엄마를 불렀어요 엄마! 창밖 보르헤스의 숲이 너무 답답해요 미쳐버릴 것만 같아요 보르헤스의 숲에는 푸른 숲이 있을까요?

 

 

 

 

프로이드와 정신 분석학

 

 

 

창가에 앉아 낡은 서적을 펼쳐든다

책이 바람에 나부낀다.

바람이 부는 틈을 타 날아오르려는 이 책의 날개를

억지로 붙잡아 들여다봐도

더듬이를 찾을 수는 없다

잠시 내가 책을 나비로 착각한 것이다

분명, 이 증상은 내가 책의 일부분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책이 내 손을 페이지로

나를 여러 장 넘겨 놓았는지도 모른다

거울을 보면, 방금 책에서 빠져나온 반동인물처럼

서른 후반의 내가 어색하다

창밖이 바람의 손으로 잠시 나를 몇 장 더 넘겨놓았는지,

내 얼굴이 점점 한 장으로 얇아지고 있다

내 표정은 비극적인 내용을 뒷받침하기 적합한 문장들이다.

이 증상들이 오후에는 비를 내리게 했다

빗물에 번져가는 수많은 파문들이

감옥처럼 세상을 가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몸은 뜨거웠던 청춘을 지나오면서

조금씩 좀이 쓸어가는 종이 바깥 쪽 질감이다

그러므로 내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주름이 많은 늙은 노인이

제 주검을 손수레에 태우고

이승을 막 빠져나가는 모습이 적혀 있다

창가에 서서 책을 펼쳐들고 읽으려는데

내 손을 벗어나려고 책이 다시 양쪽 페이지를 파닥거린다

역시 내가 나비를 책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 나비의 날개가 아무래도 정신이 나간 것 같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이라는

글자가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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