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가사문학관
▶ 찾아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 동광주 I.C 문화사거리에서 좌회전 ⇒ 농산물공판장 ⇒ 고서사거리에서 우회전 ⇒ 887번 지방국도 ⇒ 광주댐휴게소 ⇒ 담양방면 ⇒ 식영정 앞 ⇒ 직진으로 가면 좌측에 소쇄원, 우측에는 주차장
한국 가사 문학관 전경
전라남도 북쪽에 위치한 담양은 기름진 평야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수많은 문화 유산을 보존·전승해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정신을 이어 받은 조선시대 사림(士林)들은 불합리하고 모순된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큰 뜻을 이룰 수 없음을 한탄하며 낙남(落南)하여, 이곳 담양 일원에 누(樓)와 정자(亭子)를 짓고 빼어난 자연 경관을 벗삼아 시문을 지어 노래하였다.
이들은 수신과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나라의 부름을 받아서는 충성하고, 국난이 있을 때에는 분연히 일어나 구국에도 앞장섰다.
조선시대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때에 국문으로 시를 제작하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사문학이 크게 발전하여 꽃을 피웠다. 이서의 낙지가,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정식의 축산별곡, 남극엽의 향음주례가, 충효가, 유도관의 경술가, 사미인곡, 남석하의 백발가, 초당춘수곡, 사친곡, 원유가, 정해정의 석촌별곡, 민농가 및 작자미상의 효자가 등 18편의 가사가 전승되고 있어 담양을 가사문학의 산실이라고 부른다.
담양군에서는 이같은 가사문학 관련 문화 유산의 전승·보전과 현대적 계승·발전을 위해 1995년부터 가사문학관 건립을 추진하여 2000년 10월에 완공하였다.
본관과 부속건물인 자미정, 세심정, 산방, 토산품점, 전통찻집 등이 있다. 전시품으로는 가사문학
자료를 비롯하여 송순의 면앙집(俛仰集)과 정철의 송강집(松江集) 및 친필 유묵 등 귀중한 유물이 있다. 문학관 가까이에 있는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송강정, 면앙정 등은 호남시단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으며, 이는 한국 가사문학 창작의 밑바탕이 되어 면면히 그 전통을 오늘에 있게 하고 있다.
가사문학관 연못에서 입석대 담임선생님
가사문학관 앞 연못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가사문학의 개관’과 ‘가사문학관’에 대한 글이었다. 가사문학관에 들어가기 전에 글을 한번 읽어보고 관람권을 샀다. 가사문학관 건물로 들어가는 뜰에 자리한 정자(亭子)와 ‘피리부는 목동’조형물 역시 눈길을 끌었다. 건물 입구에 걸려있는 커다란 액자(성산별곡과 면앙정가가 적혀 있었다.)를 보자, 가사문학관에 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 가사 문학관 정자와 피리부는 목동 조각
전시실은 세 곳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제 1전시관은 면앙 송순, 송강 정철에 관한 자료들이 대부분이었다. 400년이 넘은 고서들을 보면서 가슴이 설레었다.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그분들의 면앙정가라던가 사미인곡 같은 가사문학의 백미 때문만이 아니라, 그 방대한 자료들 때문이었다. 많이 남아있는 목판이며, 그들의 친필 서적들, 옥배, 은배를 내놓은 후손들의 넉넉함이 더없이 부러워졌다. 그렇게 선뜻 고서들을 내놓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과연 그분들의 후손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제 2전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 2전시관은 여인들의 규방가사가 많았다. 언문으로 써져있었지만 한 줄을 제대로 읽어내려 가기가 힘들었다. 나옹화상의 서왕가, 정극인의 상춘곡, 허난설헌의 규원가 등은 익히 들어왔던 것들이지만, 모르는 작품들도 제법 있었다. 제 3전시관은 임억령, 소쇄원을 만드신 양산보, 김성원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8. 식영정(息影亭, 지방기념물 1호)과 서하당정원(棲霞堂庭苑)
가운데 별뫼 줄기 숲속 언덕에 위치한 식영정
식영정 바로 곁에 있는 서하당
정자 뒤 큰 소나무 옆에 있는 성산별곡 시비
식영정은 광주호와 무등산을 바라보며 별뫼(星山)의 혈이 뭉쳐진 자리에 좌청룡, 우백호의 산줄기까지 거느리고 있어 여러 정자들 중 가장 빼어난 경관을 가지고 있다. 광주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정자 앞으로 자미탄(紫薇灘)이라는 별칭의 창계천이 휘돌아 흐르고 여름이면 붉은 꽃을 화사하게 피워 여울을 적시고 있었을 것이어서 그 모습을 상상하면 식영정 주변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더구나 정자마루에서 바라다보는 구름 쌓인 무등산의 신비로움까지 더하면 선경이 따로 없다 할 것이다. 더구나 석천 임억령은 시가문학에 뛰어난 분이었으니 이 정자의 주인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었으리라는 생각도 함께 한다.
이 정자의 입구에는 한 쌍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수문장처럼 서 있었는데, 몇 해 전에 한 그루가 그만 벼락을 맞아 지금은 외롭게 한 그루만 남아 있다. 비록 한 그루만 남아 있지만 우리 소나무인 적송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자태는 여전하다. 문화재의 보호란 그 자체만을 보호하는 것으로는 의미가 없으며 주변의 자연환경까지 함께 보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식영정은 앞면 2칸, 옆면 2칸의 작은 규모로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 붙이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하였는데, 이곳의 지형에 알맞게 규모를 줄여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식영정 아래편의 서하당정원은 김성원이 꾸민 정원으로 부용당과 서하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은 과거의 모습이 많이 사라지고 새로 지은 건물과 송강선생을 기리는 비석으로 인해 그나마 예스러움마저 많이 손상되었다. 서하당은 정철과 짝을 이룰 만큼 학문과 문학적 조예가 깊은 분이었다고 하며, 거문고 타는 솜씨가 좋아 성산별곡의 한 구절에 등장하기까지 한다. 더구나 정유재란 때 늙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화순군 동복면의 모호산에서 부인과 함께 왜적에게 대항하다 돌아 가셨으니 그 효성의 지극함이 하늘을 감동시킬 정도였다 한다.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高敬命,1533-1592), 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息影亭 四仙)’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식영정이십영은 후에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 외에 정철은 식영정잡영 10수, 하당야좌(霞堂夜坐) 1수, 차환벽당운 1수, 소쇄원제초정 1수, 서하당잡영 4수 등 수많은 한시와 단가 등을 남겼다. 그는 이곳을 무대로 하여 송순, 김인후, 기대승 등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고경명, 백광훈, 송익필 등과 교우하였다.
식영정 옆에는 1973년에 《송강집(松江集)》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장서각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에는 부속건물로 부용당(芙蓉堂)을 건립하고, 입구에 《성산별곡》 시비를 세웠다. 주변에는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紫薇灘), 노자암, 견로암, 방초주(芳草州), 조대(釣臺), 서석대(瑞石臺) 등 경치가 뛰어난 곳이 여러 곳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광주호의 준공으로 거의 물 속에 잠겨버렸다
9. 환벽당(環碧堂, 시도기념물 1호)
조선 중기의 문신 김윤제가 후학을 가르치던 정자.
1972년 1월 29일 광주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광주광역시 북구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로,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낸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낙향하여 창건하고 육영(育英)에 힘쓰던 곳이다.
서하당정원에서 창계천에 놓여진 다리를 건너면 푸르름을 두룬 집이라는 환벽당이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정원을 바라보며 날아갈 듯 서있다. 사촌 김윤제의 서재 겸 사랑방으로 14세 소년 정철이 우연히 사촌선생을 만나 학문을 연마한 곳이기도 한다. 환벽당과 창계천 건너편의 서하당정원 사이에 지금은 시멘트다리가 놓여 있지만, 예전에는 나무로 만든 무지개다리를 놓아 서로 오갈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환벽당은 초여름이면 상사초가 곳곳에 피어 서글픔을 담은 아름다움으로 정원을 가득 메운다.
푸르름을 두룬 집이라는 환벽당
김윤제는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친 후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며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 중 한 분이 바로 정철이다. 환벽당 아래의 조대는 오래 묵은 소나무가 옛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부르기는 하지만 창계천은 이미 목욕을 하기에는 너무 더러워져 있어 안타까움이 더한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원래는 전통적 목조와가(木造瓦家) 정자 형식이었으나, 다시 세우면서 가운데 2칸은 방으로 하고 앞쪽과 오른쪽을 마루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 있고, 임억령(林億齡)·조자이(趙子以)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김윤제는 광주광역시 충효리 태생으로, 호는 사촌(沙村)이다. 1528년 진사가 되고,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그후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다.
그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철(鄭徹)과 김성원(金成遠)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과 김덕보 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역시 김윤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히, 정철은 16세 때부터 27세에 관계에 나갈 때까지 환벽당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환벽당 아래에 있는 조대(釣臺)와 용소(龍沼)는 김윤제가 어린 정철을 처음 만난 사연이 전하는 곳이다.
조부의 묘가 있는 고향 담양에 내려와 살고 있던 당시 14살의 정철이 순천에 사는 형을 만나기 위하여 길을 가던 도중에 환벽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때마침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꿈에 창계천의 용소에서 용 한마리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꿈을 깬 후 용소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비범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김윤제는 소년을 데려다가 여러 가지 문답을 하는 사이에 그의 영특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순천에 가는 것을 만류하고 슬하에 두어 학문을 닦게 하였다.
정철은 이 곳에서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등 명현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다. 후에 김윤제는 그를 외손녀와 혼인을 하게 하고 그가 27세로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환벽당 인근에 취가정, 독수정, 소쇄원이 있다. 환벽당은 정철의 4대손 정수환(鄭守環)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현재 연일 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10. 취가정(醉歌亭)
취가정 옆 석류나무 꽃
환벽당 뒤쪽으로 난 조그만 길을 따라가면 취가정이 나오는데, 이 정자는 김덕령의 후손들이 장군의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 취시가라는 시의 제목을 따서 정자이름을 붙여 놓았다. 억울한 모함으로 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 끝에 돌아가신 장군은 석주 귄필 선생의 꿈에 나타나 취시가를 읊고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취가정 앞에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정자의 운치를 더하였는데, 그만 벼락을 맞아 예전의 멋들어진 모습은 간 곳 없고 흉한 상체기의 고목으로 남아있다. 주변에 피뢰침 하나만 세워 놓았더라도 이렇게 흉한 모습이 되지는 않았을 것을, 문화재가 제 모습을 갖추고

취시가라는 시의 제목을 따서 이름 붙여진 취가정
문화재 보호 관리에 교훈을 주는 취가정 벼락에 무너진 소나무
오래도록 보존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나 외형의 확대보다 작은 정성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올린 취가정은 후손인 김만식씨가 1890년에 세웠고 6.25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니 장군의 생애처럼 정자의 운명도 기구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꼬마 니콜라 엔젤아이 백씨네박씨네 손끝으로 만드는 행복 와이에이치j21 내 손으로 만드는 인형 칼리스타 구두패션연구소 건축의 끝 사탕베게와구름솜
댓글을 달아 주세요